요한 칼빈을 읽고(하늘기획)_1

요한 칼빈을 읽고(하늘기획)_1

앞전에 읽은 책이 루터였다면 이번에는 칼빈이다. 각각의 책이 나타내고자 하는 방향이 달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앞 책에선 종교개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서 루터의 일적이 주가 되었다면 이 책에선 칼빈의 사역과 더불어 칼빈이 기독교 강해와 주석을 통해 주장하는 신학적 내용이 주축을 이룬 것 같다.

 

내 성격은 확실히 루터보단 칼빈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칼빈만한 뛰어난 머리와 언어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하나님께선 칼빈을 종교개혁의 후발주자로 그 체제를 다지기 위해 부르셨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선 그의 영광을 위해서 칼빈을 완벽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걸어다니는 병원이라 할 정도로 여러가지의 잔 질병을 앓고 있었다. 마치 바울이 외모상 형편없었고, 또 (알려진 바에 의하면) 간질을 앓고 있었듯이. 하나님께선 인간의 선에 의지하지 않으시고 인간 스스로가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여 그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이 이러한 모습을 통해 더욱 확실해졌다.

 

 

이 책을 통해서 애매하거나 잘 몰랐던 부분을 신학적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칼빈이 27세에 쓴 위대한 걸작 기독교 강해는 여전히 복음주의적 교회에서 많이 활용되는 책인 듯 하다. 전에 얼핏 흘려들어 알고 있었던 조직신학이라는 분야도 칼빈으로부터 시작됬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단 주석을 살펴본다면 성경에 대한 좀 더 해박한 지식 및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칼빈은 걸어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병약했다. 그는 위장병에다 기관지 천식에다 신경통을 비롯한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며 하루에 한 끼 정도의 식사를 하고 늘 잔기침을 하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사람 칼빈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루터 없이 칼빈 없고, 칼빈 없이 루터 없다 (중략) 필립 샵의 말처럼 루터는 단단한 바위산을 깨뜨린 사람이라면 칼빈은 루터가 캐낸 바위에 글을 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루터는 칼빈과는 달리 매우 감성적인데다가 성악가요 부흥사 기질을 가진 설교자였고, 역동적인 성격을 가진 전형적인 독일 남자였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있는 약점은 민족주의적인데가 조직력이 약한 것이 흠이었다. 이에 반해 칼빈은 루터보다는 감성은 뒤떨어지고 웅변이 없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강한 의지력, 명쾌한 문장력, 예리한 분석력,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성경만이 참된 진리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그래서 칼빈은 선배인 루터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비판할 것은 당당히 비판하고, 그 자신의 신학적 체계를 세워서 개혁 교회의 부동의 학자로 자리매김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학문이란, 그 학문 자체는 진리가 아니지만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일반 은총의 결과로 보았다.

 

 

제네바시는 사도시대 이후에 가장 거룩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네바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개념은 흔히 신정정치라고 부른다. 그런데 신정정치라 함은 무슨 신비적이고 별난 방법의 정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리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정치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율법의 명령 아래에서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에 올바르게 순종해 드리는 것이 "신정"의 중요한 핵심이다. 그러므로 제네바의 성시화 모델이 곧 바로 우리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칼빈의 성시화 운동이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성시화 운동에 던지는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 세상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극장의 무대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직업을 갖든지 우리의 삶의 분명한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배는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구체적인 삶의 행위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또한 예배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말씀에서 빛나므로 그가 우리에게 가까이 계셔서 얼굴을 마주 대하신 것처럼 주의 종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우리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 감동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칼빈의 신학은 오직 은혜의(Sola gratia)의 신학이다 (중략) "순수한 믿음만이 믿음에 선행하고."(로마서 p. 94) "믿음 자체는 은혜의 일부"(로마서 p.217)라고 했다. 칼빈의 신학은 말 그대로 "오직 은혜"(Sola gratia) 그 자체이다.

 

"우리는 신앙을 그릇에 비유한다. 우리 영혼이 입을 벌려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 드릴 수 없다."(기독교 강요 III. 11. 7)

 

기도는 신앙의 훈련이다 ¶ 또한 칼빈은 기도 자체가 신앙의 훈련으로 보았다. 즉 "신앙은 기도가 없으면 게으르고 죽은 상태에 빠진다."(시편 주석 5권 p.281) "기도까지도 신앙의 중요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열심 있는 기도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스가랴, 말라기 주석 p.403) "신앙은 기도의 어머니이다."(요엘, 오바댜 주석 p.106) "우리의 신앙을 지탱하는데 기도의 훈련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하박국, 학개 주석 5권 p.433)고 하였다. 기도에 대한 칼빈의 훈련 요점은 다음과 같다. 곧 기도는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힘쓰고 애쓰고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칼빈은 말하기를 기도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매체라고 했다. 즉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라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면 은혜와 복을 받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주장하기를 "우리들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중보에 기초해야 한다."(제네바 교회 교리 문답, 논문 2.75)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다."(이사야 주석 3 p. 286)라고 했다.

 

 

칼빈은 여기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는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일듯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하나님께 고하기에는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의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는 우리가 구한 것을 얻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확신을 갖고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섯째는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 드리드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는 우리가 연약할 때일수록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중략)

하나님께 경외심을 갖고 기도할 것 (중략) 그러므로 기도는 불경스럽거나 충동적이거나 경솔히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기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자기의 능력과 노력을 기도에 바쳐야 하고, 흔히 볼 수 있는대로 산만한 생각으로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외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경박한 태도를 갖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기 어렵다면 더 더욱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아무리 기도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고 해도 쓸데없는 생각들이 어느새 스며들어 기도의 진행을 막거나, 굴곡이 많은 길에 들어서도록 하여 진행을 더디게 만든다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III. 20. 5)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기도에 집중해야 하나 절제가 있어야 할 것을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제 있는 간구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죄를 회개하며 기도할 것

겸손히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할 것

소망을 갖고 기도할 것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